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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1.sw.sookmyung/116
2024-03-29T11:45:49Z지안 고구려비의 판독과 해석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59621
Title: 지안 고구려비의 판독과 해석
Authors: 강진원
Abstract: 지안 고구려비에 관한 논의는 그간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나, 아직 해명이 필요한 부분도 존재한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판독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 데 있다. 지안 고구려비를 통한 역사상 구명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면밀한 판독이 선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왕에 제기된 견해를 종합하여 판독·교감과 아울러 해석을 시도하였다.
최근 지안 고구려비에 관한 연구가 뜸해졌다. 현재 심도 있는 학술 조사가 행해지기 어려운 상황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가 갖는 역사적 비중을 고려하면, 이 글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접근은 계속되어야 한다.; The discussions regarding Jian Goguryeo Monument have been diverse so far, but there are still aspects that need further clarification. One example is the conflicting opinions regarding the correct way of deciphering letters.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Goguryeo through the Jian Goguryeo Monument, the inscriptions must be meticulously deciphered first. Therefore, this article attempted to integrate previous perspectives for decipherment, correlation, and interpretation.
Recently, the Jian Goguryeo Monument has received less attention than before in academia. One of the reasons is that it is difficult to conduct in-depth scholarly investigations in the present situation.
However, consider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Jian Goguryeo Monument, this kind of research needs to be continued.2023-12-01T00:00:00Z1985년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59686
Title: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Authors: 강혜경
Abstract: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 1972년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을 전개하였다. 7차에 걸쳐 진행된 남북적십자회담은 1973년 북한측의 일방적 통고로 중단되면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였다. 1974년 7월부터 적십자회담의 재개를 위해 남북적십자의 실무회담을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1978년 3월 19일 북한 적십자회중앙회 측의 일방적 무기 연기 통고에 따라 중단되었다. 1980년 중반 남북한은 ‘제2의 대화 시대’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와 교류가 진전되었다. 1985년은 남북간에 대화와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해로 5번의 경제회담, 국회 회담을 위한 예비접촉 두 차례, 1번의 체육 회담(로잔), 3번의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1984년 북한 적십자회중앙회측의 수해물자 제공의사를 대한적십자사가 수용한 것을 계기로 남북적십자회담도 다시 재개되었다. 1985년 제8차, 9차, 10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열렸는데, 특히 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남북적십자회담의 결과 1985년 9월 분단 40년만에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을 상호교환하는성과를 이루었다. 1985년 남북고향방문단의 교환을 통해 가족이나 연고자를 만난 이산 가족은 평양에서 상봉한 남한측 가족 35명, 서울에서 상봉한 북한측 가족30명 등 모두 65명이라는 제한된 규모, 제한된 지역의 방문이었다. 3박 4일의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공연예술단의 교환이었지만, 분단의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가를 재확인해주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여전히 체제 대립 속에서 진전된 단계로 나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단과 공연예술단 교환의 성과이며 남북한의 교류를 통해 이질화를 해소하는 것은 이후 과제가 되었다.; The Korean Red Cross has been holding inter-Korean Red Cross talks since 1972 to reunite separated families. Seven rounds of inter-Korean Red Cross talks were halted due to North Korea's unilateral notification in 1973 and did not produce any results. Working-level talks between the South and North Korean Red Cross began in July 1974 to resume the Red Cross talks, but even these were suspended following a unilateral notice of postponement by the North Korean National Red Cross Association on March 19, 1978. By the mid-1980s, dialogue and exchange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had progressed to the point where it could be referred to as the ‘second era of dialogue.’ 1985 was the year when dialogue and exchange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were most active, with five economic talks, two preliminary contacts for the National Assembly meeting, one sports meeting (Lausanne), and three Red Cross talks. Inter-Korean Red Cross talks were also resumed when the Korean Red Cross accepted the North Korean Red Cross Central Committee's intention to provide flood damage supplies in 1984. The 8th, 9th, and 10th inter-Korean Red Cross main talks were held in 1985, and in particular, at the 8th inter-Korean Red Cross main talks, an agreement was reached on the reunion of separated families. As a result of the inter-Korean Red Cross talks,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of division, the south and North Korean separated families' hometown visitation groups and art performance groups were exchanged in September 1985. In 1985, the separated families who met their families or relatives through the exchange of South and North Korean hometown visiting groups were limited in size and limited to a limited area, with a total of 65 people, including 35 South Korean family members who were reunited in Pyongyang and 30 North Korean family members who were reunited in Seoul. Although it was a three-night, four-day reunion of separated South and North Korean families and an exchange of performing arts groups, it provided a historical opportunity that reaffirmed how great and deep the pain of division was. Although South Korea and North Korea recognized each other as partners for dialogue and showed success in reuniting separated families, there were still limits to advanced stage in the midst of system conflict. The achievement of the exchange of the South and North Korean separated families' hometown visitation group and performing arts groups was that it became the starting point for South and North Korea to get to know each other, and the subsequent task was to resolve the differences through exchang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2023-12-01T00:00:00Z조선시대 왕비 초상화 제작과 그 중단 원인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59457
Title: 조선시대 왕비 초상화 제작과 그 중단 원인
Authors: 한희숙
Abstract: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뿌리 깊은 숭불사상의 영향으로 왕의 어진뿐만 아니라 왕비의 초상화를 그려 原廟나 願刹 등에 봉안하고 天福을 기도해 왔다. 왕비의 초상화를 그린 목적은 복을 빌고 제사를 지내는 祭儀的 의미와 함께 왕손들로 하여금 조상을 추모하게 하려는 뜻에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 왕비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왕비의 초상화는 신의왕후, 신덕왕후,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 정희왕후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초상화는 도화원의 전문화가들에 의해 그려져 원묘나 선원전에 보관되었으나, 그 외에 사적으로 승려들에 의해 그려져 원찰에 봉안된 것들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종 대 중반 이후에는 왕비의 초상화는 그려지지 않았다. 왕비의 초상화 제작이 중단된 원인은 억불정책과 이에 따른 불교적 관습의 쇠퇴와 유교 사회의 진전에 따른 유교식 제례로의 변화, 그리고 내외법의 강화 때문이었다. 성리학과 『주자가례』의 보급에 따라 조선 건국 후 풍습을 비롯한 전반적 인 의식이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바뀌면서 제례에서 불교식 영정 대신 유교식 위패 로 대체되었다. 또 내외법이 강화됨에 따라 왕비의 초상화를 남성 화원이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위패 중심의 유교식 제례로의 변화와 내외법의 강화로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전통은 사라졌다. 더욱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전에 남아 있던 왕비의 초상화들 은 모두 사라졌다. 이후 17세기 말에 서화를 좋아했던 숙종이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시도했지만, 내외법에 어긋난다는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혀 결국 좌절되었다. 이후 왕비 초상화를 그리는 문제는 전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는 대한제국기 왕실 여성들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왕비도 얼굴을 알 수 없게 되었다.2023-10-01T00:00:00Z관음신앙의 불교사적 의의와신라 海水觀音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51628
Title: 관음신앙의 불교사적 의의와신라 海水觀音
Authors: 정병삼
Abstract: 관음신앙은 사람들의 온갖 바람을 실현해주는 신앙이다. 관음은 여러 유형의 경전 내용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현세적 신앙에 더하여 아미타불의 극락왕생 제도를 돕는 협시보살, 여러 가지 요청에 응하기 위해 32 또는 33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변화신 등이 생겨났다. 그리고 관음이 일정한 곳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신앙이 화엄경 에 수용되었다.
법화경 을 토대로 한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은 7세기 무렵에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다음 세상에서의 구제를 바라는 아미타신앙과 짝을 이루며 사람들에게 널리 환영받았다. 아들을 낳기 위해, 바다에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소식이 끊긴 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고치기 어려운 병을 낫기 위해, 눈먼 이가 광명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관음을 찾았다.
관음의 현실 구원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 관음보살이 이 땅에 직접 살고 있다는 眞身常住 신앙이다. 진신상주 신앙은 관음이 풍광 좋은 바닷가 바위에 앉아 신앙인들에게 바람을 성취해 준다는 설정으로 인도에서 시작하여 동아시아 각국이 자국에 관음도량을 설정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신라에서는 洛山 관음도량을 개설하여 신앙인들의 순례길을 이끌었다. 낙산 관음도량은 義相이 7세기에 시작했다고 전승되어 9세기 梵日에 이르러 확인되고 이후 고려에서 더욱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의 동해안 普陀山 관음도량은 9세기 중반 일본승 慧鍔의 개창으로 전승되었지만, 이미 7세기 중반 王勃이 보타산으로 부른 것처럼 그 유래는 더 이전으로 올라간다. 이들 모두 바닷가에 자리를 마련한 海水觀音들이다.
보타산 관음도량은 그 개창에 신라인들이 깊숙이 관여했다. 혜악의 개창에 신라 상인이 크게 도움을 주었고, 고려도경 에서는 觀音像 봉안의 주인공을 혜악이 아닌 신라 상인이라고 밝혔다. 이런 기록들은 보타산 觀音院 개창에 신라인들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입증한다. 보타산 관음원의 주 목적은 개창자들의 성격에서도 드러나듯이 黃海를 오가는 해상 안전의 도모였다. 이는 신라인들이 크게 활동하던 赤山 法華院의 신앙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이런 지향은 적산 법화원 활동의 토대를 열었던 張保皐 船團의 신앙 지향과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2023-08-01T00:00:00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