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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윤치호의 군사문제에 관한 이해Yun Chi-ho's Understandings about Military Affairs during the period of enlightenment for Joseon Dynasty

Other Titles
Yun Chi-ho's Understandings about Military Affairs during the period of enlightenment for Joseon Dynasty
Authors
강명숙
Issue Date
Sep-2020
Publisher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Keywords
Yun Chi-ho; the period of enlightenment; Military affairs; Korean Military reformation; Japanese Military reformation; the Sino-Japanes War; the Russo-Japanese War; the Battle in Lu-shun; the Battle in Shenyang; 개화기; 윤치호; 군사문제; 조선의 군사개혁; 일본의 군사개혁; 청일전쟁; 러일전쟁; 뤼순전투; 센양(봉천)전투
Citation
군사, no.116, pp 51 - 98
Pages
48
Journal Title
군사
Number
116
Start Page
51
End Page
98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214
DOI
10.29212/mh.2020..116.51
ISSN
1598-317X
Abstract
윤치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윤치호가 국가의 독립보다 근대화를 우선시하여 문명국 지배하의 근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치호의 개화론은 친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내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문명이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하고, 조선의 국정개혁도 군사개혁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립이 근대화의 기본 조건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무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윤웅렬은 별기군의 훈련 책임자였기에 윤치호의 유학은 군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윤웅렬이 절도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내 조선의 군사개혁을 개인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도 있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군사개혁은 국왕의 안위를 위해 최우선 추진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치호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았다. 먼저 조선왕조의 유교적 문치주의가 상무정신을 말살하여 군대양성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다음은 근대 군사력에 대한 전문가가 집단이 없어 외세의 주도로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였는데 국제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주도 세력의 변화로 군사제도가 제대로 안착되지 못했다. 군대조직은 만들어졌으나 인적 물적 자원만 소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외세와 연관된 조직들의 난립으로 국가적 군대로도 거듭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관료들의 부패와 맞물려 군인들의 기강도 해이해져 군대는 새로운 부패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결국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은 근대적 군대양성에 실패하여 국제사회에서 벨기에 형 중립화(=보호국화)의 추진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사들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어 상무정신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었다. 그 결과 지역의 번주들이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실험하여 종국에는 일본의 군사제도를 형성하였다. 세계 최고의 영국 해군과 독일 육군의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만들었고 근대적 무기와 작전으로 무장했다고 보았다. 일본의 근대적 군사력은 양무운동으로 유사(類似) 근대화된 청군에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에서도 지리적 약점과 보급선의 문제로 소극적인 러시아 군대를 적극 공격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제국주의 시대 제3세계는 외세의 침입을 방어해야 독립도 근대화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관료들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근대적 개혁을 새로운 수탈통로로 만들었다. 조선은 독립의 첫 번째 조건인 군대양성에 실패했고 국제사회는 중립화(벨기에형)라는 사기(詐欺)적 방법으로 독립의 후원자(보호국화)를 결정하려 하였다. 일본은 국제여론을 등에 업고 조선 침략을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다. 윤치호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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