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여산 송씨 우곡 송량의 가계와 사회적 위상Yeosan Songssi WooGok Song Ryang 's lineage and social status in the 17th century
- Other Titles
- Yeosan Songssi WooGok Song Ryang 's lineage and social status in the 17th century
- Authors
- 한희숙
- Issue Date
- Dec-2018
- Publisher
- 한국계보연구회
- Citation
- 한국계보연구, v.8, pp 67 - 108
- Pages
- 42
- Journal Title
- 한국계보연구
- Volume
- 8
- Start Page
- 67
- End Page
- 108
- URI
-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929
- ISSN
- 2093-9825
- Abstract
- 본 논문은 17세기 상주 지역의 향촌 지식인이었던 송량(宋亮)의 가계와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송량은 여산(량) 송씨 13대 후손이다. 여산 송씨는 고려시대 진사였던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한다. 중시조인 송송례(宋松禮)가 고려 원종 11년에 권신 임유무를 주살하고 왕정을 복고시킨 공으로 여량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두 아들 염(琰)과 분(玢)의 활약으로 여산 송씨는 대성(大姓)이 되었다. 이어 이들의 아들 대를 중심으로 크게 5개의 파로 나뉘어졌다. 송량의 가문은 조선 건국 후 상당한 관직을 역임한 명문이었지만 할아버지 세휘가 연산군대 갑자사화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상주로 내려온 이후 아버지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상주지방에서 활동한 재지 사족이 되었다.
송량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성운(成運)·정국성(鄭國成)·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허후(許厚)·정경세(鄭經世) 등 보은-안동-성주 지역의 매우 명망 있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송량은 학문적으로 성운과 이황의 영향을 받았고, 47세 때 상주 목사로 부임해 온 서애 유성룡을 만나 교류하였다. 그는 학문적 수준은 매우 높았고 충·효의 예절을 생활화하였다. 송량의 효행은 매우 컸고, 그를 본받은 자녀들의 충·효·열은 향촌의 풍속 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상주가 왜적에게 함락되자 지역 유림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고, 이후 상주지역의 향풍을 교화하기 위해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1566년에 노기·정국성·김각 등 16인과 함께 낙사계(洛社稧)를 조직하여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고, 1598년에는 우곡정사(愚谷精舍)를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이후 1606년에는 김각, 정경세, 조정, 이전, 이준, 김광두 등과 합력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또 임진왜란 뒤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김각·김광두·정경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였다. 송량은 일평생 상주에 거주하며 향촌 사회의 교화에 힘썼던 향촌 사족이자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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