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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조선시대 국가의 의례 가운데 국왕의 혼례는 중요한 의례였다. 이때에 차려진 혼례음식은 왕실의 문화와 왕권의 실상을 반영한다. 친영을 통해 왕비를 맞이한 국왕은 궁궐에 도착하여 同牢를 치렀다. 왕비와 절을 하고 술을 나누어 마시는 交拜禮에는 술안주인 酒味와 味數가 차려졌다. 同牢宴에는 油蜜果로 장식을 한 同牢宴果床과 면협상에 연회식음식이 올려졌다. 18세기 영조대에 국왕 혼례음식은 변화하였다. 영조는 경비 절약과 국혼의 규모를 일정하게 하기 위하여 御製國婚定例를 편찬하였다. 이 책의 규정은 이전의 혼례와 비교하여 同牢宴果床은 분량을 축소하였으며, 면협상은 종류를 축소하였다. 또한 味數가 크게 축소되고 8종류로 정리되었다. 또한 영조는 정순왕후와의 혼례에서 동뢰연의 음식을 진설하지 않게 함으로써 절약의 뜻을 실천하였다. 19세기 국왕 혼례는 어린 왕의 즉위, 垂簾聽政의 시행, 왕위계승의 특수성, 혼례의 진행양상과 관련하여 혼례음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純祖는 즉위후 초혼을 치렀기에 영조와 같이 혼례음식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또한 11세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이 시행되며 왕권이 약하였다. 그러므로 선왕의 절약정신을 반영하면서도 국가의 의례를 회복하여 왕권을 높이려는 조처로 國婚定例보다 축소된 규모로 혼례음식을 진설하였다.憲宗의 혼례에서 혼례음식은 國婚定例의 규정을 회복하였으며, 哲宗과 高宗은 이를 전례로 하여 따랐다. 헌종 철종 고종은 즉위 직전 관례를 치르고 즉위후에 혼례를 치렀던 만큼 이들의 왕권은 약했다. 반면 혼례음식은 영조와 순조대보다 음식종류와 수량이 많아져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졌다. 이는 실제로 동뢰연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왕권이 약할수록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조처로 의례를 강화하였던 것이나 선왕의 유지를 따르는 형식으로 國婚定例의 규정을 넘지는 않았다. 이처럼 강화된 혼인의례는 반면 약화된 왕권의 허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19세기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 제목
- 19세기 국왕 혼례음식의 변화와 의미
- 제목 (타언어)
- Change and meaning of the food for king's marriage ceremony in 19th century
- 저자
- 임혜련
- 발행일
- 2006-12
- 저널명
- 한국사상과 문화
- 호
- 35
- 페이지
- 113 ~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