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보기
초록
세종의 본격적인 통치는 동왕 4년 5월에 태종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親政이 개시된 이후에도 곧바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政界에는 여전히 태종의 侍從舊臣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친정을 계기로 왕권강화를 도모해야 했던 세종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 행사를 위해 시종구신 중심의 정치 구도를 해체하고 정계를 새로 개편해야 했다. 金道練 賄賂事件은 바로 이러한 요구가 있던 시기에 발생하여, 세종초반 정계개편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세종 8년에 밝혀진 ‘김도련 회뢰사건’은 김도련이라는 자가 노비를 쟁송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7명의 전․현직 대소신료에게 많은 노비를 증여한 전형적인 뇌물수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특히 인사권ㆍ병권에 관여했던 핵심 인사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정치적 파장도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김도련 회뢰사건은 세종의 진상조사 촉구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태종의 주요 시종구신들을 퇴진시킴으로써 정계를 개편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우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政曹의 판서를 자주 교체하여 그 재임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신료집단의 인사권 장악도 견제하였다. 또한 김도련 사건 이후 議政府의 議政 구성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 이전까지 의정부 의정들은 거의 대부분 공신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공신출신 의정들이 모두 물러나고, 황희ㆍ맹사성과 같은 비공신 출신들로 교체되었다. 이는 곧 최고합좌기구에서 창업기의 주요세력이 물러났음을 의미한다. 결국 세종은 이 사건을 활용하여 정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세종은 김도련 사건을 정치적으로 확대시켜 정계개편을 도모하였지만, 사건을 처리하고 마무리할 때에는 이전과 매우 다른 방식을 지향하였다. 그는 관기 쇄신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며 밑으로부터 점진적인 세력교체를 추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일어난 이 사건을 활용하여 시종구신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 처벌은 ‘贓吏를 경계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였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충ㆍ불충의 논리가 배제된 만큼, 주요 인사들이 전면 교체되면서도 논죄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았고, 이후 그들의 복권도 보다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즉 세종은 태종생존기까지 주로 활용되었던 忠ㆍ不忠에 따른 토역논리를 지양하여 가혹한 治罪확대를 가급적 축소하고, 士風 쇄신이라는 전제 하에 관료의 불법행위와 도덕적 물의만 단죄하는 수위에서 정치국면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건국 이래 추구되었던 武斷的인 왕권방식이 세종 친정이후 비로소 지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키워드
- 제목
- 세종초반 金道練 賄賂事件과 政界改編
- 제목 (타언어)
- Kim Do Ryeon's Bribery Case and Political Reconstruction Early in King Sejong Era
- 저자
- 유재리
- 발행일
- 2009-03
- 저널명
- 조선시대사학보
- 호
- 48
- 페이지
- 39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