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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통치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으로서 고적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실시된 고적조사사업은 중앙의 조선총독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거나 사업을 진행시키기에는 인력과 재정적인 면에서 많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던 사업이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행부서로서 각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의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고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일제 강점기 지방고적보존회의 역할이 해당 지역의 고적을 비롯한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보호, 관리, 현창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시행되었는데 실제 그 명칭은 다양하다. 이 가운데 본고의 주제가 되었던 부산고고회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참여하였다든가 활동 내용적인 면에서 조금 색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역할만은 다른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부산고고회의 설립 및 활동, 그리고 부산박물관의 설립 추진 운동을 통해 부산지역에서 타 지역의 지방고적보존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부산고고회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고고회는 1931년 9월 12일 설립되어 1936년까지 활발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파악되며 1940년대 초반까지는 유지되었던 단체로 보인다. 회원은 주로 부산과 부산 주변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들로 부산을 중심으로 고고학에 관련된 연구 및 그 취지의 보급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설립 초기 회원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와 부산 주재 기간이 긴 사람들이었으며, 1936년 이후에 새롭게 회원이 된 사람들은 주로 교원들이었다. 부산고고회에 참여한 인물들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은 패총, 와, 토기, 청자 등 일찍부터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로 부산고고회 설립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가 진행하는 고적조사사업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부산고고회의 회칙을 검토한 결과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다른 지방고적보존회의 회칙과 그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굳이 차별성을 들면 그 명칭에 맞게 지방고적보존회는 지방 고적의 보존에 중점을 두었다면, 부산고고회의 경우는 연구활동에 중심을 두었음이 차이라고 보아진다. 부산고고회의 주요활동은 강연회 등 학술발표회 개최, 연구여행 및 발굴조사, 전람회 등을 통해 연구 자료 수집 공개, 보존 방법의 강구 등이었으며, 1935년경에는 고적지의 보존을 위해 나무로 푯말을 세우기도 하였다. 강연회 등 학술발표회의 주제는 패총을 중심으로 한 선사시대 관계가 가장 많으며, 그 외 와 및 도기 관련, 왜성 관계, 낙랑 관계 및 박물관 관계 등 주제가 다양한데 주로 부산지역의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한 강연이었다. 연구여행 및 발굴조사 활동은 주로 패총, 왜성 조사 연구와 와ㆍ토기의 수집 연구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1935년에 고적지 네 곳에 목재 標柱를 세우는 등 ‘향토’ 지역에서의 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현창하고자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밖에 수집 자료에 대한 전람회를 개최함으로써 전시활동을 병행하였다. 대체로 전람회는 회원의 수집품인 와, 토기, 도자기가 전시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이와 더불어 성과 에도시대의 왜관, 그리고 개국 이후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의 역사 등 부산 ‘향토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또한 부산고고회가 부산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박물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현안은 재정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부산고고회는 두 차례의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부산 실업가 가운데 한 명인 香椎源太郞과 교섭하였다. 그러나 재정을 부담하는 香椎와 부산부의 입장 차이라는 근본적인 원인과 당시 경남 지사, 내무부장 전출, 香椎 아내의 사망 등의 이유로 박물관 건립 계획은 이후 추진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부산박물관 건립에 관여한 또 한 사람은 黑板勝美이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黑板은 박물관건설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부산에서 5,6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고, 香椎의 경매품을 의뢰받았으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매의 실수입은 만족한 수준이 되질 못했다. 그후 몇 차례에 걸쳐 박물관 건립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부산박물관은 개관하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만 香椎가 박물관을 세우려 했던 본정 香椎公園 내에는 박물관 대신 그의 동상만이 1935년에 세워졌다. 비록 박물관 설립은 1942년에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부산고고회는 1941년 9월까지는 그 활동 모습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요컨대 부산고고회의 활동은 부산이라는 지극히 지역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부산 주재 아마추어들에 의해 그 지역의 패총 및 왜성이 연구되어졌으며, 그런 과정에서 유물들이 수집 전시되었다. 부산고고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역사학이나 고고학 전문가들이기보다는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지역고적보존회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향토 문화를 탐구하였다. 박물관 사업 또한 역사적인 박물관의 설립이기 보다는 향토박물관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설립코자 하였으나 부산부와의 의견 차이로 끝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키워드
- 제목
- 1930년대 부산고고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고찰
- 제목 (타언어)
-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and activities of the Pusan Archeological Society during 1930s
- 저자
- 이순자
- 발행일
- 2008-06
- 저널명
- 역사학연구
- 호
- 33
- 페이지
- 153 ~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