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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지역 미션스쿨의 지정학교 승격과 학교 인계 과정 연구Raising of Mission Schools in Seoncheon to Designated Schools and Transfer of Schools

Other Titles
Raising of Mission Schools in Seoncheon to Designated Schools and Transfer of Schools
Authors
박혜진
Issue Date
Feb-2010
Publisher
호남사학회
Keywords
Presbyterian Church U.S.A.; Mission School; Seoncheon; Sinsung Hakkyo; Bosung Girls’ School; Designated school; Foundation school; Withdrawal of educational ministry; Pyungbuk Presbytery; Euisan Presbytery; Youngchun Presbytery; Whittemore(N. C. Whittemore; or Wee Dae Mo); Jang Lee Uk; Stevens(Blanch I. Stenvens; or Seo Ae On); 미북장로회선교부; 미션스쿨; 선천;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지정학교; 재단법인; 교육선교 철수; 평북노회; 의산노회; 용천노회; 휘트모어(N. C. Whittemore; 위대모); 장리욱; 스티븐스(Blanch I. Stevens; 서애온); Presbyterian Church U.S.A.; Mission School; Seoncheon; Sinsung Hakkyo; Bosung Girls’ School; Designated school; Foundation school; Withdrawal of educational ministry; Pyungbuk Presbytery; Euisan Presbytery; Youngchun Presbytery; Whittemore(N. C. Whittemore; or Wee Dae Mo); Jang Lee Uk; Stevens(Blanch I. Stenvens; or Seo Ae On)
Citation
역사학연구, no.38, pp 261 - 291
Pages
31
Journal Title
역사학연구
Number
38
Start Page
261
End Page
291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54941
ISSN
1975-2431
Abstract
미북장로회선교부는 서울·평양·대구·선천의 네 선교지부에서 8개의 남녀 중등학교를 경영하였다. 그 가운데 선천지역에 설립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는 지역민들과의 유대가 긴밀한 곳이었다. 서울·평양·대구의 학교들을 선교사들이 설립했던 것과는 달리 신성학교는 선천지역 유지들이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7년 선교비가 축소되어 학교가 폐교 위기에 몰리자, 선교부 외에 평북·의산노회가 학교 운영에 이사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 해에 한국인 교장이 취임하였다. 신성학교의 지정학교 승격운동은 192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한국인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장리욱 교장의 취임과 선천 시민들의 주도적 운동으로 1931년 3월에 지정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을 완성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930년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북장로회선교부 경영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닥쳤을 때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인계 경영되었다. 1920년대부터 한국인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장로회선교부가 한국의 교육사업에서 철수를 결정했을 때 비교적 쉽게 평북·의산·용천 3노회로 인계경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북장로회선교부 경영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도 학교재산 일체를 무상으로 양도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선천선교지부를 거쳐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학교 이사회, 동문회, 선천 시민 등 각계 각층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신성학교는 5만원의 사례금으로, 보성여학교는 7천원의 사례금으로 평북·의산·용천 3노회로 인계되었다. 인계된 이후 경영난에 빠지자 철산 오씨 문중이 신성학교를, 노정린·백형덕 등 한국인들이 보성여학교를 지원하여 두 학교가 유지되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신성학교는 선천중학교로, 보성여학교는 선천여자상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선교부 경영이었던 학교에 한국인이 참여하고, 또한 한국인 노회 앞으로 인계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선천 지역민들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움직임은 매우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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