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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와 미국 남감리교 선교 - 개성지역을 중심으로 -Yun Tchi - ho And The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 Focussed on Gaeseong Region -

Other Titles
Yun Tchi - ho And The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 Focussed on Gaeseong Region -
Authors
강명숙
Issue Date
Dec-2016
Publisher
한국사학회
Keywords
Yun; Tchi-ho;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the Anglo-Korean School; the New People’s Society; the Model Town Project; the Movement of YMCA; Gaeseong; Gaeseong Region Merchants; 윤치호; 미국 남감리교; 한영서원; 신민회; 모범촌 설립운동; YMCA운동; 개성; 개성상인
Citation
사학연구, no.124, pp 135 - 172
Pages
38
Journal Title
사학연구
Number
124
Start Page
135
End Page
172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10011
ISSN
1225-133X
Abstract
1885년부터 1893년 가을까지 중국과 미국 남부에서 유학한 윤치호는 귀국 후 개성상인들의 풍부한 자본과 상재(商材)를 조선의 산업발전에 이용하기 위해 남감리교의 개성선교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감리교는 남부의 발전을 위해 흑인선교와 아프리카 선교에 몰두하였으므로 아시아 선교는 소극적이었다. 중국 선교부와 윤치호의 노력으로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으나 남감리교 선교본부의 지원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였다. 더구나 조선에 파견된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중심 말씀 중심의 선교를 고집하여 윤치호가 계획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성 선교는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 윤치호는 남감리교 중국 선교부의 선교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개성으로 이주하여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농업중심의 실업교육에 나섰다. 윤치호의 실업교육은 농업을 육성하여 생산을 증진하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중농주의 산업화였다. 그러나 농업중심의 실업교육(반공과)은 일제가 제정한 ‘사립학교령’과 ‘개정 사립학교령’에 의해공업부로 재편되어 일제가 요구하는 노동자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한영서원의 실업장은 선교사들의 주도로 근대 공장으로 변모하였으나 조선의 산업화를 견인하지 못하고,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제공하는 선교부의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1907년 안창호와 손잡은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을 민족자본가로 결집하려는 ‘신민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치호는 모범촌을 만들고 개성상인들을 모범촌에 참여시킴으로 ‘신민회’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교본부의 지원이 미진하여 모범촌을 설립하지 못했고 산업화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하여 이재에 명민한 개성상인들의 참여를 도출하지 못했다. 그래도 윤치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선교본부의 지원을 호소하고, 학생YMCA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개성상인들의 ‘신민회’ 참여를 끝내 유도하지 못했다. 윤치호가 추진한 개성상인들의 민족자본가화는 실패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윤치호가 파트너로 설정한 개성상인들이 조선의 근대화운동을 외면한 이유는 개성상인들의 자본이 토지와 대부업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성상인들은 일제의 조선미 수탈정책과 인삼전매제도 그리고 금융경영에 편승하여 인삼과 미곡 중심의 토지 경영과 고리대금업에 안주하면서 산업자본가로의 변신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성상인을 근대화의 파트너로 선택한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종교운동과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기다렸다고 하겠다. 윤치호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민족 발전에 투신할 기독교 자본가의 출현을 남감리교 선교를 통해 도모하였으나 선교와 변혁의 대상이었던 개성상인들은 윤치호의 노력을 외면하였다. 윤치호는 유학시절 입장료를 내면서 쫓아다녔던 존스(Samuel P. Jones : ‘남부의 Moody’로 불림)의 부흥운동이 조선에서도 재현되어 라이먼(T. G. Ryman)과 같은 희생적인 자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윤치호가 간절히 바라던 조선의 근대화는 이기적인 식민지 토착자본의 논리와 선교사들의 자기편의적 선교정책 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둘러 싸여 갈 길을 잃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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