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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반 거란의 동향 변화와 고구려-660년 거란의 이반을 기점으로-The Koguryo(高句麗) and The Situation Changes of Kitan(契丹) in the Middle of the 7th Century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Alienation of Kitan in 660 Years-

Other Titles
The Koguryo(高句麗) and The Situation Changes of Kitan(契丹) in the Middle of the 7th Century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Alienation of Kitan in 660 Years-
Authors
김지영
Issue Date
Dec-2011
Publisher
만주학회
Citation
만주연구, no.12, pp 75 - 100
Pages
26
Journal Title
만주연구
Number
12
Start Page
75
End Page
100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52403
DOI
10.22888/mcsa..12.201112.75
ISSN
1738-3668
Abstract
7 세기 고구려와 당의 쟁에서 거란( 契丹) 을 포함한 북방 제민족( 諸民族) 들의 동향은 요한 변수다.특히 거란의 경우는 지리인 면에서 고구려 와 당의 최방이라는 에서나 말갈( 靺鞨) 과 함께 때때로 고구려병의 일부 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여타 다른 북방 민족들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당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당,돌궐( 突厥) 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형국 이었다.그러나 630년 돌궐의 힐리가한( 詰利可汗)생포를 전후해 당은 북방 민족들에 대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이에 고구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러나 연개소문 정권이 등장하는 6 4 2 년 이전까지는 고구 려와 당은 일단 우호적인 외교책을 통해 전쟁의 압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연개소문 집권 이후 강경한 당의 정벌의지로 인해 당과의 외교관계는 악화되어 갈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고구려 정벌의 명분이 마련된 6 4 2 년에도 당은 북쪽 설연타( 薛延陀) 의 대두 등으로 인한 북방의 안정이 확보되지 못 한 상태에서 쉽사리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지 못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이 새로운 중국의 통일왕조로써 주변 국가들에 대한 당 중심의 세력 재편을 위 해서 고구려는 반드시 정벌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에 6 4 5 년 당 태종의 친정이 단행되기에 이르렀고,이 과정에서 고구려 는 주필산( 駐蹕山) 전투 이후 급박한 정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설연타에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다.그 결과인지 혹은 고구려가 당태종의 공격을 무사히 막아낸 결과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결국 당 태종이 고구려에서 군대를 미처 다 돌리기도 전에 설연타의 이반이 발생했다.그리고 그 결과 당은 일부의 병력을 고구려 전선에서 빼 내에 설연타와의 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은 고구려로 하여금 북방 제민족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교섭을 진행하게 하였을 것이다.더욱이 6 4 5 년 이후 계속되는 당과의 전투로 인해 고구려 내부의 자원은 고갈되어 갔고,연개소문 독재로 인한 정치적 모순 역시 증가되면서 고구려 내부의 결속이 약화되어 갔다. 그 결 과 6 6 0 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고구려 내부 분열과 이탈이 가속화되어 갔으 며,그럴수록 고구려는 주변 국가나 북방 제 민족들과의 외교관계에 있어 보다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6 4 5 년 이후 지속인 당의 총공세에도 무지지 않은 고구려의 군 사력은 6 6 0 년을 전후하여 당 중앙의 혼란으로 인해 혹은 북방 제 민족에 대한 지나친 징발로 인해 당에 대한 불만을 지닌 북방 제 민족들이 고구려의 편으로 돌아서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그 결과 6 6 0 년 이후 거란 및 해( 奚) , 철륵 제부( 鐵勒 諸部)등 북방 제민족의 대다수가 당에서 이반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백제 정벌을 전후하여 고구려를 직 공격하던 당은 일부의 병력을 대 고구려 선에서 빼내어 북방에 투입시킬 수밖에 없었 다.특히 거란의 이반은 6 4 5 년 이후 고구려 공격에 빈번하게 동원되던 거란 병이 더 이상 고구려 공격에 동원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 공격시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북쪽 후방 지역까지 당군이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그것은 결국 당군 전력의 분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이 로 인해 고구려는 당과의 전투에서 좀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고,이것은 결국 고구려의 지속적인 외교의 승리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즉,고구려 는 물적 인적 자원이 고갈되고 내부 결속이 약화되어 이탈이 발생하는 최악 의 조건 속에서도,뛰어난 외교정책의 구사로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이 일 어나기 이전까지는 당의 총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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