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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의 羅州 南幸시 公州 경유의 배경과 의의The Background and a Meaning the Via Gongju(公州) While the King HyeonJong in the Goryeo Dynasty going to Naju(羅州) of the South

Other Titles
The Background and a Meaning the Via Gongju(公州) While the King HyeonJong in the Goryeo Dynasty going to Naju(羅州) of the South
Authors
홍영의
Issue Date
Oct-2010
Publisher
한국중세사학회
Keywords
the King HyeonJong(顯宗); GongJu(公州); NaJu(羅州); Kim Eun-Bu(金殷傅); de facto place of the Royal Family(御鄕地); 현종; 공주; 나주; 김은부; 어향지
Citation
한국중세사연구, no.29, pp 149 - 176
Pages
28
Journal Title
한국중세사연구
Number
29
Start Page
149
End Page
176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52453
ISSN
1225-8970
Abstract
이 글은 고려시대 현종의 나주 남행시 공주 경유의 배경과 의의를 살펴보고, 공주의 위상을 검토한 것이다. 고려 때 이민족의 침입 때문에 국왕이 수도 개경을 버리고 피난한 경우는 요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한 현종이 처음이었다. 이후 몽골 침입으로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경우와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경우가 있다. 이 과정에서 나주나 안동은 친 왕실 지지 성향을 보이면서 줄곧 왕실의 어향지처럼 대우받았다. 그러나 공주만큼은 예외였다. 물론 개인적으로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가 이후 외척으로서 문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주는 나주나 안동만큼 국왕과 왕실의 각별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이유는 공주가 지닌 역사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예는 왕건과 견훤의 후삼국 쟁패과정에서 공주가 점거의 제1목표가 되면서 공주와 홍성 등 이 일대 10여 군현과 함께 후백제에 호응한 때로부터 출발한다. 왕건은 이러한 공주지역을 재점령하고자 934년 후백제와 정면대결을 벌였는데, 이때 웅진 이북 30여 성의 항복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태조이래 친고려적이던 안동이나 나주와는 다른 모습이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車嶺以南 公州江外’의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내린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이와 같은 상황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군현제 개편 때 廣州․충주․원주․청주․상주․양주․전주․光州․춘주․명주 등과 함께 공주를 11개의 대읍으로 인정하고, 종전의 웅주가 공주로 명칭을 바뀌었다는 점은 그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983년(성종 2) 崔承老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의 12개 주에 외관을 파견하였을 때, 양주․廣州․충주․청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과 함께 공주도 상주하는 외관이 파견되었다는 점 역시, 공주의 지역적 위상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공주가 가진 정치적 성격보다 경기․전라도를 잇는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을 인정한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현종이 처음부터 공주나 나주를 목표로 피난의 길을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현종의 남행은 공주나 나주 등 지방사회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의 침입을 겪은 현종은 개경과 나주로의 南幸 과정에서 겪은 정치적 어려움으로 지방제도의 개편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효과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현종의 공주에서의 留宿은 결국 새로운 정치지배 세력의 잉태라는 이후 문벌귀족 사회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공주의 節度使였던 金殷傅의 환대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한 대우는 결국 현종의 정치적 위상을 공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仁州李氏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잉태시킨 배경이 되었다. 이는 현종대 정치세력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면서 현종의 왕권강화에도 토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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