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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울에서의 광대 문화 변동과 판소리Pansori : through the change of Kwangdae's culture in the later period of Joseon Dynasty in Seoul

Other Titles
Pansori : through the change of Kwangdae's culture in the later period of Joseon Dynasty in Seoul
Authors
손태도
Issue Date
Jun-2009
Publisher
한국고전문학회
Keywords
Kwangdae; Narye-heui; Pansori; Hwa-geug; Jaedam-sori; Kwageo; 광대; 儺禮戱; 판소리; 話劇; 재담소리; 科擧
Citation
고전문학연구, no.35, pp 103 - 139
Pages
37
Journal Title
고전문학연구
Number
35
Start Page
103
End Page
139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52490
DOI
10.17838/korcla.2009..35.004
ISSN
1225-1445
Abstract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성립된 광대 소리의 하나다. 또한 이러한 판소리는 조선 후기 전반적인 광대 문화의 변동 속에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후기에 판소리가 성립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광대들의 주요 공연물의 하나였던 話劇이 조선 후기에 들어 더 이상 광대들의 주요 공연물이 되지 않았던 것에 있다. 화극은 궁궐의 儺禮戱를 주요 문화적 기반으로 하였다. 화극은 매년 연말이면 광대들이 궁궐의 나례희에서 궁궐 안에서만 살아 궐 밖의 일들을 잘 모르는 임금을 주관객으로 하여 궐 밖의 여러 일들을 한 명의 광대가 중심이 되어 간단한 재담과 흉내내기를 통해 연극으로 꾸며 보여 주는 것을 주요 문화적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곧 인조 이후 이러한 궁궐의 나례희가 폐지됨으로써 이러한 화극이 더 이상 광대들의 가장 주요한 공연물이 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궁궐의 나례희가 폐지된 이후에는 이러한 종래의 화극 혹은 재담극에 광대들이 그들의 또 하나의 장기인 소리까지도 동원해 재담소리를 만들었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판소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임ㆍ병 양란 중에 광대들이 많이 흩어져 조선 후기에 들어서 중앙의 산대희에 종래처럼 경기도 지역까지의 광대들만으로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하자 종래와 달리 이러한 중앙의 산대희에 8도의 광대들 특히 전라도의 광대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중앙의 산대희에서의 전라도 광대들 중심으로의 변화는 이후의 광대 문화가 전라도 광대들 중심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 전라도 광대들에 의해 판소리의 성립과 발전이 본격화된다. 이 외에도 광대들의 민간에서의 가장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던 과거 급제자의 행사도 조선 후기 민간 문화의 발달로 더욱 화려해졌다. 이러한 과거 급제자의 행사도 과거가 열리고 과거 급제자들도 많았던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 서울에서의 광대 문화의 변동이 조선 후기 판소리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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