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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개경의 궁궐 조영과 운영Construction of A Palace and Management Aspect of Gaegyeong in Goryeo Dynasty

Other Titles
Construction of A Palace and Management Aspect of Gaegyeong in Goryeo Dynasty
Authors
홍영의
Issue Date
Apr-2010
Publisher
한국중세사학회
Keywords
개경․궁궐․전각․궁문․본궐; GaeGyeong; palace; palace building; palace door; basic palace
Citation
한국중세사연구, no.28, pp 289 - 340
Pages
52
Journal Title
한국중세사연구
Number
28
Start Page
289
End Page
340
URI
https://scholarworks.sookmyung.ac.kr/handle/2020.sw.sookmyung/54924
ISSN
1225-8970
Abstract
이 글은 고려시기 개경의 궁궐의 조영과 명칭 변화를 통해 그 변화의 시기적 특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개경의 궁궐과 도시 시설은 크게 태조 때(수도건설 당시~성종), 현종대(거란침입 이후), 몽골침입 이후(고종~개경환도 후) 홍건적의 침입과정에서 크게 변모되었다. 대체로 고려 초기의 정궁은 天德殿이, 성종과 현종 때는 乾德殿과 會慶殿이, 인종 16년 이후에는 宣慶殿과 大觀殿이, 고종 이후에는 본궐로서 宣慶殿과 康安殿이, 원간섭기 이후에는 주로 延慶宮과 壽昌宮이 壽康宮․壽寧宮 등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궁궐의 정형을 이루었던 현종대의 궁궐 공사는 현종 2년 10월부터 5년 정월까지 ‘신궐’의 조영을, 11년 8월부터 14년 8월까지 ‘대내’의 중수 등을 통해 궁궐의 복구가 이루어졌으며, 궁궐의 전각(문)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모두 소실된 탓도 있었지만, 이후 기존의 殿閣과 宮門의 이름을 새로이 고쳤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고종대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된 인종대의 궁궐의 정형은 이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였다.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는 궁궐 복구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과 원제의 영향 탓에 이전의 궁궐의 복구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궁궐은 주로 延慶宮과 壽昌宮이 국왕의 정치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기존의 康安殿, 大觀殿과 같은 의례의 중심 공간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던 이유는 고려가 원의 제후국으로 편입되면서 고려 전기와 중기를 능가할 만한 궁궐의 규모를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오히려 원과의 관계를 고려하거나, 생존한 선왕들 때문에 이궁들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었고, 원 공주와의 혼인 등으로 인해 원식의 새로운 궁궐을 짓는 등의 변화된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이궁 건설과 명칭의 차이는 결국 고려-원의 대외적 위상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에 의해 강안궁과 연경궁이 중수되지만, 정궁으로 사용하던 연경궁이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고 말았기 때문에 공민왕대까지 본궐-연경궁 체제로 유지되었던 고려 궁궐의 위상은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다. 공민왕 때 추진된 수창궁의 복구가 우왕 때 이룩되면서 楸洞闕 대신에 정궁으로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양왕이 즉위하여 수창궁에서 정사를 보는 등 정궁의 지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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